시에라 네바다 산맥 팰리세이드 빙하(Palisade Glacier)
급경사 협곡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만년 빙하 아래 옥색 호수가 눈부시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모습(오른쪽 아래)이 작게 보인다.
답이 뻔한 질문 하나. 캘리포니아에 만년 빙하(Glacier)가 있을까? 답은 ‘예스’. 하지만 과연 만년 여름이 연상되는 해변과 오렌지의 땅 캘리포니아 그 어디에 빙하가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터.
LA에서 북쪽으로 네 시간이면 가 닿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아직도 여름이 한창이다. 395번 국도 오른쪽으로는 데쓰 밸리가 폭염 속에 잠겨 있고, 왼쪽으로는 1만 4000피트급의 화강암 첨봉들이 한여름 햇빛을 되쏘고 있다.
10개가 넘는 이 첨봉들은 어느 한 곳도 쉽사리 등정을 허락하지 않는 준봉들이다. 이 봉우리들 어깨 사이로 수백여 성상동안 그 존재를 감춰 온 빙하가 웅크리고 있다.
이달 중순 재미대한산악연맹 등반대와 기자가 1만 4000피트급의 봉우리들이라고 해서 ‘캘리포니아 포티너스’로 불리는 이곳의 봉우리들을 등반하러 나선 길에 이 빙하를 만났다.
팰리세이드 글레이셔(Palisade Glacier), 700년 전 소빙하기(Little Ice Age)에 생성돼 인고의 세월을 간직해 온 이 빙하는 동쪽의 마운트 실(Mt. Sill)을 비롯해서 서북쪽의 마운트 썬더볼트(Mt. Thunderbolt)까지 1만 4000피트급 봉우리들을 무려 다섯씩이나 호위무사처럼 거느리고 있다.
이 봉우리들의 꿀르와(급경사의 협곡)에서 이 빙하가 시작되고 있다. 길이 0.8(1.3km)마일에 폭 0.5마일에 이르는 이 빙하는 매년 23피트(7m)씩 아래로 이동하고 있다. 해발 고도는 1만 3400피트(4084m)에서 1만 2000피트(3658m)에 걸쳐 있다. 대개 강 혹은 바다로 이어지는 다른 빙하와 달리 빙하 아래 쪽에 빙하호가 생성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미세한 화강암 가루가 섞인 빙하호는 햇빛을 받아 고운 비취색으로 빛난다. 손을 담그면 금새 물이 들것 같다.
풀 한포기 찾아 보기 힘든 살풍경에 소리마저 얼어 붙은듯 하다. 아니 시간마저 얼어붙은 건 아닐까. 이따금 빙하가 쪼개져 호수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귓전을 때릴 뿐이다. 그렇게 떨어져 나온 빙산들이 수면위로 삐죽삐죽 솟아 있다. 생각없이 호수에 손을 담갔다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드니 빙하위로 영겁의 시간과도 같은 쪽빛 하늘이 흐르고 있다.
허훈도, 송원주 대원이 전날 식당에서 주문해 온 설렁탕을 준비하고 있다. 없어서 못 먹을 식욕이 불과 하루 만에 급전직하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초입에서 바라다 보이는 시에라 네바다의 준봉들. 8월 중순이 이러니 목도리처럼 두르고 있는 스노 패치는 필경 만년설일 터.
■금요일 밤하늘 별들이 어깨 위로 쏟아질 것만 같다. 퇴근 후 칠흑과도 같은 밤길을 달려 자정이 가까워서야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지만 모처럼 맞이하는 산행 첫밤을 그냥 보낼 수야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송원주 산악연맹 이사가 ‘입산허가’를 얻느라 홀로 새벽길을 마다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하루 온종일을 기다려서 만났으니, 그냥 잘 수야 없지 않은가 말이다. 주윗사람들 눈치를 보며 연신 맥주캔을 비워낸다.
눈을 붙이겠다고 차량들 사이에 침낭을 깔고 누우니, 누군가는 벌써 두런두런 출발준비를 서두른다.
■토요일 6000피트가 넘는 곳이다 보니 새벽 기온이 차다.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고서 준비해 온 설렁탕을 비운다. 1만 2165피트의 캠프까지는 대략 8마일, 야영장비에 아이스 클라이밍을 대비한 안전벨트, 헬멧, 피켈, 크램폰, 로프 등을 챙겼으니 무게가 만만치 않다.
8마일 동안 6000피트의 고도를 높이게 되니, 얼마가 걸릴 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모두들 이미 ‘무거운 나이’가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설마 오늘 중에는 도착하겠지. 모두들 여유만만이다.
남은 음식은 아이스박스에 넣어 차량 밑으로 밀어 넣었다. 음식 저장고는 아이스 박스보다 낮았다. 시야가 탁 트인 길을 걸으니 발걸음도 가볍다. ‘사우스 포크’ 저쪽으로 ‘작은 요세미티’라 불러도 좋을 멋진 경관이 펼쳐진다.
길은 ‘노스 포크’로 접어 들며 ‘환상의 루트’가 시작된다. 트레일은 야생화들이 앞다투어 피어 있는 오솔길로 이어진다. 왼쪽 아래로는 힘찬 계류가 크고 작은 폭포를 이루며 흘러간다. 계곡옆 시원한 그늘아래서 세수도 한다. 차가운 계류에는 자연산 송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참에 점심까지 해결한다.
문득 왼쪽 아래로 호수가 나타난다. 에메랄드빛 물색이 화강암 봉우리와 대조를 이룬다. 이어서 두번째, 세번째… 이 길은 줄줄이 일곱 개의 호수가 이어지는 트레일로 유명하다. 서서히 입에서 단내가 느껴진다. 사람 귀한 트레일에서 갑자기 말을 탄 ‘카우보이’가 나타난다. 아까부터 길에 말똥이 굴러다녀 신경이 쓰였는데, 이 놈이 그 주인공이다. 원하는 손님과 말을 타고 며칠씩 시에라 일대를 유람다니는 가이드란다. 말 그대로 ‘주유천하’다.
트레일은 세번 째 호수를 지나서 두 갈래로 나뉘어 진다. 주유천하족과 고산등반족의 갈림길인 셈이다. 길은 왼쪽으로 접어들자 마자 지그재그의 스위치백으로 변한다.
샘 맥 메도우(Sam Mack Meadow), 해발 고도 1만 761피트에 위치한 초원이다. 서북쪽의 만년설에서 시작된 시냇물을 따라서 초지가 형성돼 있다. 왼쪽으로 가야할 길이 하늘 높이 뻗어 있지만 차마 외면하고 싶다. 여기다 잠자리를 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아침에 길을 떠나서 여섯 시간이 훌쩍 지났다.
맞은 편 산등성이는 이미 발길을 서두르는 태양의 잔광으로 붉게 물들었다. 배는 고프다 못해 쓰리고, 머리는 어지럽고 발은 천근만근이다. 내일 4천 피트를 올라야 하니, 예서 잘 수는 없다. 마지막 캠프까지는 2000피트가 남았다. 샘 맥 메도우 골짜기를 벗어나니 길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가끔씩 조그맣게 쌓아놓은 돌탑이 이정표를 대신한다. 잡는 돌은 구르고, 딛는 바위는 흔들거린다. 마지막 고개려니 하지만 이미 몇차례 낙담을 경험한지라 일말의 기대마저 버렸다. 천신만고 끝에 마지막 능선을 올라서니 해는 지고, 길은 간 곳 없이 설상가상이다. 크게는 자동차만 하게, 작게는 책상만한 바위들이 널려있다. 날카롭기까지 한 바위들 사이를 헤드랜턴으로 길을 잡으며 간다.
문득, 불빛에 텐트 칠 자리가 잡힌다. 어딘가에 빙하가 있고, 올라야 할 봉우리(Mt. Sill)가 있을 테지만 머리 위로 별들만 쏟아진다.
■일요일 새벽 4시, 텐트 바깥은 살을 에이는 영하의 날씨다. 하루만에 정반대의 날씨를 경험한다. 눈녹인 물로 건조식품을 불려 아침을 해결한다. 머리는 어지럽고, 입안은 깔깔하기 그지없다. 5시 30분, 마운트 실을 향해 허훈도 부회장과 송원주 이사, 편도용 이사가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나선다. 기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텐트에 남기로 한다. 그들이 떠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텐트밖으로 나오니, 손톱같은 새벽달이 산등성이에 걸려있다.
멀리서 세개의 불빛이 가물거린다. 웅크리고 잠깐 조는 사이 어느새 희붐하게 동녘이 밝아 온다. 병풍처럼 둘러선 검은 봉우리들은 여명으로 끝이 붉게 물들었다. 추위에 몸을 떨며 눈을 비벼 뜨니 새벽빛에 원시의 공룡처럼 엎드려 있던 거대한 빙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날 기자를 제외한 세 대원은 정오 경에 마운트 실을 등정했다. 캠프에는 오후 4시가 되어서 귀환했다. 고소증세와 허기에 따른 체력저하가 최대의 적이었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하산을 시작해서 주차장에 도착하기까지는 6시간이 더 걸려야 했다. LA 도착은 이튿날 새벽 4시경.
▷TIP ㆍ이 루트에는 5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 하루 25개의 입산허가(Permit)가 주어지는데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395번 도로 선상의 론 파인 레인저 스테이션에서 선착순으로 받을 수 있다. 비용 무료. ㆍ론파인 레인저 스테이션 주소; S Main St AT State Hwy 136, Lone Pine ㆍ문의:(760)873-2483
www.fs.fed.us/r5/inyo /www.sierranevadawild.gov
인요 국유림의 존 뮤어 윌더니스에 들어선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짜장면이 생각난다거나, 시원한 콜라가 생각난다면 산행을 계속할 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ㅎ
목은 갈증으로 타고, 등줄기엔 땀이 빗물처럼 흘러내리지만 간혹 만나는 야생화는 그 모든 갈증을 씻어주기도 한다. 아주 잠깐이지만.원추리가 눈부시다. 미국에서는 레오파드 릴리(Leopard Lily).
잠깐 쉬어가기에 좋은 초지 사이로 맑고 청량한 시냇물이 흐른다. 두고 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일곱 개의 호수가 줄지어 있는 트레일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실트(Silt)가 섞여서 호숫물이 온통 에메랄드 빛이다. 실트는 모래와 진흙의 중간 크기의 입자로 주 성분은 수정과 장석으로 이뤄져 있다. 그 광물질이 빙하 혹은 눈에 씻겨 호수로 유입된다.
자꾸만 발길을 붙잡는 샘 맥 메도우(Sam Mac Meadow), 얼마 지나지 않아 수목들을 볼 수 없게 되는 천상의 초원이라고 할까. 냇물을 건너 왼쪽 골짜기로 대원들이 사라지고 있다.
썬더볼트 피크에서 내려다 본 팰리세이드 빙하의 모습이다. 오른쪽 끝이 바로 마운트 실. 왼쪽 아래로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 빙하호이다. 2008년 7월 25일 등반 때의 사진. 그때는 비숍 패스로 올랐었다.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대원들, LA였더라면 아직도 한낮의 기온이 90도를 오르내릴텐데, 간밤에 녹인 물이 꽁꽁 얼었다. 빙하 위로 시에라 네바다의 준봉들이 푸른 여명 속에 잠겨 있다. 왼쪽의 첫 봉우리가 마운트 실(Mt. Sill 14,159ft), 오늘의 목표다. V 나치(Notch), U 나치, 노스 팰리세이드, 스타라이트 피크까지 보이고, 연전에 올랐던 오른쪽 썬더볼트 피크는 보이지 않는다. 날카로운 막돌들이 깔린 틈새에 넓다란 반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 반석이 없었더라면 비박을 했어야 됐으리라. 누군가 잤던 한 사람이 겨우 몸 누일 자리들이 있긴 했지만.
손에 잡힐 듯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걸릴 지, 정상에 오를 수나 있을 지 올려다 보는 마음들이 착잡하기만 하다.
대원들이 출발하고도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아침 햇살이 찾아온다.
억겁의 세월을 견디어 낸 빙하의 속살이 조금씩 드러난다.
출발하고도 두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겨우 너덜지대를 벗어나고 있다.
하루가 삼년 같았다. 외계의 어느 행성이 이럴까. 숨도 차고, 머리도 아프고, 입안은 모래를 뿌려 놓은 듯 깔깔하다. 걸음도 휘청거린다. 그래도 이 기분을 누가 알랴. 이 기분으로 미진 가득한 사바세계에서 한 철을 보낸다. 그 약기운(?)이 떨어지면 다시금 고산을 올려다 본다.
어서 빨리 내려가서 핫 윙에 맥주나 한잔 걸쳤으면...
*이 포스팅은 시간이 좀 경과된 것입니다. 하지만 필수 정보는 좀 전에 확인도 하고, 혹시나 기후 변화로 인해 그새 빙하가 녹아버렸을까 확인을 했지만 만년 빙하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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